이번 문서의 목표: 성리학이 고려 말 수용되어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은 과정을 파악하고, 이황의 주리론과 이이의 주기론을 사단칠정논쟁을 통해 비교하며, 10편에서 다룬 사화·붕당의 흐름을 사상적 배경과 연결해 이해한다.
왜 사화·붕당을 다시 사상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가
10편에서는 사화와 붕당 정치의 시작을 정치 세력의 대립(훈구파-사림파, 동인-서인)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했다. 이 편은 같은 사건들을 성리학이라는 사상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 독학사 4단계는 정치사와 사상사를 따로 떼어 놓지 않고, “이 정치 세력이 어떤 사상적 입장을 가졌는가”, “이 학자의 사상이 어느 붕당과 연결되는가”를 묻는 문제를 자주 낸다. 그래서 이 편은 성리학의 수용 → 통치 이념화 → 학파 분화 → 붕당과의 연결이라는 순서로 사상의 흐름을 정리한다.
쉽게 말하면: 10편이 “누가 누구와 싸웠는가”를 다뤘다면, 이 편은 “그 사람들이 각각 어떤 생각(사상)을 가지고 있었길래 그렇게 갈라졌는가”를 다룬다.
성리학의 수용과 조선의 통치 이념화
고려 말 수용에서 조선 건국 이념으로
성리학(性理學,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함께 탐구하는 유학의 한 갈래)은 고려 말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수용되어,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던 고려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는 새로운 사상적 무기로 활용됐다.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 성리학적 명분을 바탕으로 고려 말의 여러 폐단을 개혁하려 했고, 그 흐름이 조선 건국으로까지 이어졌다.
정도전: 재상 중심 정치와 억불의 논리
조선 건국의 사상적 설계자로 꼽히는 인물이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성리학적 명분을 바탕으로 불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한 저술(불씨잡변佛氏雜辨 등으로 전해짐)을 남겨 조선의 억불(抑佛, 불교를 억제함) 정책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그는 국왕 한 사람의 자질에 국정이 좌우되기보다, 능력 있는 재상(宰相)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정치를 운영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입장은 10편에서 다룬 “왕권 강화(6조 직계제)와 신권 강화(의정부서사제) 사이의 줄다리기”라는 구도가, 이미 건국 초기 정도전의 사상 속에서부터 씨앗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쉽게 말하면: 정도전은 “훌륭한 임금 한 명에게 모든 것을 걸기보다, 능력 있는 신하들의 합의체가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끄는 것이 낫다”고 본 인물이다.
이기론: 성리학의 핵심 개념
성리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이(理, 만물의 근본 원리·이치)와 기(氣, 만물을 이루는 구체적인 재료·에너지)로 세상을 설명하는 이기론(理氣論)이다.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학자들의 입장이 갈렸는데, 조선 성리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두 입장이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이다.
- 이(理): 사물이 그렇게 존재하고 움직이는 근본 원리·이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기(氣): 이가 실제로 드러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재료·힘. 눈에 보이는 만물의 재료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는 “설계도(원리)”, 기는 “그 설계도로 실제 지어지는 건물의 재료(현실의 재료)“에 비유할 수 있다. 두 학자의 차이는 “설계도와 재료 중 어느 쪽에 더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하는가”에 있다.
이황과 이이: 주리론과 주기론의 비교
이황의 주리론과 영남학파
이황(李滉, 퇴계)은 이(理)가 능동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에 가까웠으며, 후대에 그의 학풍을 잇는 학자들은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해 영남학파로 불린다. 이황의 학풍은 이후 붕당 정치에서 동인 계열과 가깝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 둘 만하다.
이이의 주기론과 기호학파
이이(李珥, 율곡)는 기(氣)의 역할과 현실적 작용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는 입장에 가까웠으며, 그의 학풍을 잇는 학자들은 주로 경기·충청 지방(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해 기호학파로 불린다. 이이의 학풍은 이후 붕당 정치에서 서인 계열과 가깝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 구분 | 이황(퇴계) | 이이(율곡) |
|---|---|---|
| 입장 | 주리론 | 주기론 |
| 학파 | 영남학파 | 기호학파 |
| 붕당과의 연결 | 동인 계열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음 | 서인 계열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음 |
사단칠정논쟁: 이론이 실제 논쟁으로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벌어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은 조선 성리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학술 논쟁이다. 사단(四端)은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의 실마리(측은지심 등)를, 칠정(七情)은 기쁨·노여움 등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을 가리킨다. 이 논쟁은 사단과 칠정이 이(理)와 기(氣) 중 각각 무엇에서 비롯되며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두고 벌어졌으며, 이황과 기대승이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입장을 정교하게 다듬어 간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이 논쟁의 쟁점은 이이와 성혼 사이의 논의로도 이어지며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을 한층 심화시켰다.
쉽게 말하면: “착한 마음(사단)과 일반적인 감정(칠정)이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가”를 두고 벌인 조선 성리학 최대의 논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붕당 정치 이론의 변화
10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붕당 정치는 1575년 동인·서인 분당으로 시작됐다. 붕당이 이념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붕당 자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정치 이론도 함께 등장했다.
이이는 붕당을 무조건 없애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옳고 그름을 가려 조정해야 한다는 조제(調劑, 서로 다른 입장을 고르게 조절함)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면서도 그 대립이 지나치게 격화되지 않도록 조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이러한 붕당에 대한 인식은 훗날 영조·정조 대에 특정 붕당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한 탕평책(蕩平策)의 사상적 배경으로 이어지는데, 탕평책의 구체적인 전개는 17편에서 조선 후기 정치사와 함께 다룬다.
예학과 양명학: 성리학 심화와 소수 학풍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리학은 상장례(喪葬禮, 상례와 장례) 등 구체적인 예법을 학문적으로 정밀하게 다루는 예학(禮學)으로도 발전했으며, 이는 붕당 간의 예법 해석 차이가 정치적 쟁점(예송논쟁 등)으로 번지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한편 성리학이 주류였던 조선에서도 양명학(陽明學, 마음이 곧 이치라고 보는 중국 명대의 유학 사상)을 연구하는 소수의 흐름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가 있다. 양명학은 조선에서 비주류에 머물렀지만, 성리학 일변도였던 조선 사상계에 다른 관점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종종 출제 포인트가 된다.
자주 틀리는 점
- 이(理)와 기(氣)를 “옳음과 그름”처럼 가치 판단의 개념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는 사물의 근본 원리, 기는 그 원리가 드러나는 구체적 재료·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가치 판단과는 다른 층위의 개념이다.
- 이황의 주리론과 이이의 주기론을 붕당과 무조건 일대일로 단정하는 경우가 있다. 학파와 붕당의 연결은 “그런 경향이 많았다”는 정도의 일반적 연관성이며, 모든 학자·붕당원이 예외 없이 그 구도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 사단칠정논쟁을 이황과 이이 두 사람 사이의 논쟁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논쟁의 상대는 기대승이며, 이이는 이후 성혼과의 논의를 통해 이 쟁점을 이어받았다.
- 양명학과 성리학을 같은 사상으로 뭉뚱그려 이해하기 쉽다. 양명학은 성리학과는 결이 다른 사상으로, 조선에서는 정제두의 강화학파 등 소수 흐름에 그쳤다는 점을 구분해야 한다.
핵심 정리
- 성리학은 고려 말 신진사대부를 통해 수용되어 조선 건국의 통치 이념이 됐으며, 정도전은 성리학적 명분으로 억불을 뒷받침하고 재상 중심 정치를 지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 이(理, 근본 원리)와 기(氣, 구체적 재료·힘)를 중심으로 한 이기론에서, 이황은 주리론(영남학파), 이이는 주기론(기호학파)의 입장을 대표한다.
-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은 사단(선한 본성의 실마리)과 칠정(일반적 감정)이 이·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둘러싼 조선 성리학 최대의 논쟁이며, 이후 이이-성혼의 논의로 이어졌다.
- 붕당 정치에서 이이는 붕당을 조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고, 이는 훗날 탕평책의 사상적 배경으로 이어지며, 성리학은 후기에 예학으로 심화되는 한편 정제두의 강화학파 같은 양명학 소수 흐름도 함께 존재했다.